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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하탄 한인타운에 유명한 한식당 중 하나인 북창동 순두부집에서는 17달러로 따듯한 순두부 찌개 하나를 먹을 수 있다. 뉴욕에서라면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팁까지 고려하면 이만 오천 원. 순두부찌개 하나에 이만 오천 원, 이만 오천 원…. 여행하려고 모은 돈인데도 쉽게 쓸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뉴욕의 모든 게 비쌌다. 미국에 처음 와서 먹은 스타벅스 맛차 라테. 귀리 우유를 넣은 그것은 한 잔에 8,500원이었다. 직원이 친절한 미소로 싱긋 웃으며 팁을 선택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나는 조용히 ’No tip’을 눌렀다. 숨죽이며 먹은 맛차 라테는 지금껏 먹은 라테 중 제일가는 맛이었다. 뉴욕에서는 생수도 비싸, 라고 누군가 말했다. 에어비앤비는 꿈에도 못 꾸었다. 주말이 되면 한 층에 스무 명이 넘게 자는 호스텔도 1박에 10만 원이 넘었고 지하철 1회권은 2.9달러로 서울의 3배였다.

아무래도 이곳의 물가를 제대로 만만히 본 게 확실했다. 나는 아직 추운 4월의 맨하탄 거리를 걸으며 발상부터가 틀렸어, 라고 생각했다. 뉴욕에 오게 된 이유는 별 게 없었다. 내가 있었던 레이캬비크에서 저렴하게 갈 수 있는 항공편이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로스엔젤레스로 가면(그것도 뉴욕에서 사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 김 군도 볼 수 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섹스 앤드 더 시티도 우디 엘런도 프렌즈도 패티 스미스도 엘리샤 키스가 부르는 뉴우으요옥 때문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래서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온전히 한 곳에 있을 줄을 몰랐고 그저 그 일대를 정처 없이 걸어 다니고 걸어 다녔다. 그러다가 사흘째 되는 날 지독한 몸살감기를 앓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감기약을 아무리 먹어도 나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십 키로의 백팩과 이십 키로짜리 캐리어를 이끌고 숙소를 옮겨 다녔다. 한인 민박에서 며칠 묵었던 나는 한 방에서 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뉴욕을 얼마나 잘 누비고 다니는지에 대한 자랑을 쉼 없이 들었다. 여자는 한국 관광객이라면 꼭 방문해야 하는 장소란 장소는 모두 들르는듯 했고 남자는 게이바에서 술을 진탕 마셔서 기억이 나지 않는 지난밤을 자못 흐뭇한 미소로 회상했다. 저마다 어떤 뉴욕을 보내든지 간에 나는 이곳을 전혀 즐기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함께 순두부를 먹으러 가는 길에 토로하는 나에게 남자는 이 공간을 둘러싼 건물의 형태가 새롭지 않냐고 물었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는 건물 외벽을 따라 설치된 철제계단이 그야말로 뉴욕의 상징과 같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화재 대피용 계단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눈은 흐려졌고 몸은 움츠러들었다.

일주일이 지날 무렵 결론을 내렸다. 뉴욕은 한마디로 나에게 과하다! 모든 게 넘쳐나는 풍요로움이 나에게는 욕심과 자만심으로 느껴졌다. 새벽까지도 불이 꺼지지 않는, 전 세계 모든 것들이 모인 집결지. 브로드웨이 공연과 재즈, 복창동 순두부, 소호, 차이나 타운, 모마, 첼시마켓. 모두가 뉴욕을 각자의 방식대로 소비하고 있는데 나는 이곳에서 소비하는 게 두려웠다. 곳곳에 걸린 성조기와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었고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나에게 전혀 와닿지 않았다. 이렇게 넘쳐나는 데에도 공허한 건 왜지? 모든 것이 있다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문득 나는 무엇을 위해 뉴욕에 있는 것인지 아주 막연해졌다. 다른 이들의 뉴욕과 나의 것을 비교하니 깊은 좌절감이 몰려왔다. 쉽게 우울해지거나 눈물이 그렁해졌고 자주 외로워졌다.

마음 터놓을 곳 없이 침대에 누워 울고 있는데 누군가로부터 디엠이 왔다. 며칠 전 길거리에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자메이칸 사내였다. 오늘 밤 그가 아는 아주 멋진 자메이칸 클럽에 함께 가기로 했는데 몇 시에 만날 거냐는 메시지였다.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서 미안하지만 약속을 취소해야겠다고 하자 그는 드라이브라도 해주겠다고 나섰다. 나는 감정을 내뱉을 곳이 필요했고 걔는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 서로에게 윈윈인 것 같아서 나가겠다고 했다. 밤 열 시에 아는 것이라곤 이름과 뉴욕에 살고 있다는 것뿐인 남자의 슈퍼카 조수석에 앉아 걔가 만든 자메이칸 노래를 들으며 두 시간을 울었다. 그것은 뭐랄까 묘한 조합이었다. 내가 지금껏 들은 자메이칸 느낌의 노래라고는 스컬 앤 하하 밖에 없었는데, 그의 노래는 뭔가 조금 더… 시끄러웠다. 나는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눈물을 왕창 쏟아냈다. 그는 위로의 의미로 내 손을 쓰다듬어주었는데 그닥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엄마 얘기도 해주고 인생 얘기도 해줬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 한 가지 기억 나는 것은 내가 다음 행선지인 LA로 간다면 기분이 훨씬 더 나아질 거라고 장담했던 것. 그곳에는 아주 좋은 햇볕과 좋은 해변이 있다고 했다. 적어도 여기에서 지겹도록 맡게 되는 마리화나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울 만큼 다 운 나는 그만 집에 가고 싶다고 했고 그는 웨스트 32번가에서 부드럽게 유턴을 하여 숙소가 있는 14번가에 데려다주었다.

뉴욕에서 두 번째 주말을 맞을 여유가 없었다. 마음의 여유도 체력의 여유도 지갑의 여유도 없는 나는 남은 기간 동안 카우치서핑을 통해 밤을 보낼 곳을 찾아보았다. 카우치서핑은 말 그대로 Couch(소파)를 Surfing(서핑) 한다는 뜻이다. 호스트는 자신의 집에 누워서 잘만 한 공간을 무료로 제공하고 여행자는 감사한 마음으로 지낸 후 다음 여행지로 떠난다. 기본적인 형식은 이러하지만 호스트도 여행자도 그 너머의 것을 교류하고자 하는 경우가 크다. 문화교류, 경험교류, 언어교류 등. 사람과 상황, 관계에 따라서 서로 마음이 맞는다면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거나 도시를 돌아다니며 놀 수도 있다. 끝내주게 멋진 대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겐 한 마디로 잃을 게 없는 선택지였다. 얻어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왕창 얻고 싶었다. 뉴욕은 나에게 너무나도 매서웠고 나는 온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처음 발을 디딘 초입자를 선뜻 재워줄 호스트를 구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괜찮은(적어도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빙해야 하는데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뉴욕을 여행하는 사람은 넘쳐날 정도로 많고 그들 중에서도 흥미로운 사람으로 보여야 호스트에게 요청을 했을 때 수락될 확률이 높았다. 뉴요커들에게 보낸 수십 개의 오퍼가 거절당하거나 무시되었고 헝그리 정신으로 여행하기에는 몸도 마음도 전부 소진되어 갔다. 고민 끝에 나는 LA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앞당기기로 했다. 자메이칸 사내의 말대로 그곳이 지금의 암흑기를 바꿔줄 터닝포인트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그리고 뉴욕을 떠나기 하루 전, 카우치 서핑에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안녕!
뉴욕에서 숙박은 다 정해졌니?
원한다면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호스트 해줄 수 있어.

브루클린 거주, 영어와 스페인어에 유창함, 하버드 대학교 졸업, 87세 남자



악몽 같은 이곳에 조금 더 지내보라는 메시지였다.